<징비록> 줄거리, 저자 소개, 느낀 점에 대하여 적어보려고 한다. 7년의 전쟁의 총지휘관이었으면, 전쟁이 일어나기 전 이순신을 천거했던 류성룡은 비록 힘이 없어 명의 힘을 빌렸지만, 그들을 으르고 달래면서 백성들의 어려운 생활을 눈앞에서 생생하게 지켜보았다. 나라의 존폐위기에 명나라로 피난 가려고 하는 임금의 마음을 돌이키는 것도 자신의 몫이었다. 북인들의 상소로 관직이 삭탈되어 고향으로 내려왔지만, 다시는 임진왜란과 같은 난을 겪으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그날을 돌아보아 후손에게는 경계로 삼고자 하였다.
줄거리
1592년 4월 일본군이 부산진에 상륙하여 동래성을 함락시켰다. 신립이 이끄는 관군이 충주의 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하고 곽재우, 조헌이 의병을 일으켰다. 5월에 선조가 평양을 거쳐 의주로 몽진을 했고 한양은 함락되었다. 하지만, 남해에서 이순신이 옥포해전에서 승리의 소식을 전해왔다. 6월에는 평양성이 함락되었고, 명에서 원군 1진이 도착했다. 이순신이 한산도에서 승리의 소식을 전해왔고, 사명대사가 묘향산에서 승병을 일으켰다. 10월에 김시민이 진주대첩에서 승리하였다. 12월에 명군이 파병되었고, 1593년에 1월에 조. 명연합군이 평양성을 수복하였다. 2월에 권율이 행주대첩에서 대승하였다. 5월에 일본과 휴전회담을 전개했지만, 조선이 빠지고 명과 일본이 밀실합의를 하였다. 8월에 일본군이 남해안까지 퇴각하였다. 1594년 삼수병으로 구성된 훈련도감을 설치하였고, 11에는 속오군을 편성하였다. 1597년 1월 정유재란이 발발하였다. 2월에는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서 파직되었고 백의 종군하였다. 7월에 원균이 칠전량에서 패전하였고,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에 복귀하였다. 9월에 이순신이 명량해전에서 승리하였다. 1598년 8월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였고 9월에 일본군이 철수를 개시하였다. 그리고 11월에 노량해전에서 승리하였지만, 이순신이 전사하였다. 자신은 북인들의 상소로 관직삭탈 당하여 고향인 안동으로 내려왔다.
저자 소개
저자 서애 류성룡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인문학자, 의학자, 저술가이다. 본관은 풍산, 자는 이현, 호는 성애이고 경상도 의성 외가에서 태어났다.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김성일과 동문수학하였다. 성리학에 정통하였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직전 군관인 이순신을 천거하여 전라좌수사로 임명하도록 하였고, 임진왜란 때 4도 도제 찰사, 영의정으로 어려운 조선 조정을 총 지휘하였다. 하지만, 노량해전이 있던 날 정인홍, 이이첨 등의 북인의 상소로 영의정에서 관직 삭탈되어 안동으로 내려갔다. 그리고 고향에서 임진왜란 때 겪은 후회와 교훈으로 후세에 남기기 위해 '징비록'을 저술하였다. 이 책은 대한민국 국보 제132호다. 죽을 때까지 청렴하고 정직한 삶을 살았던 청백리로 '조선의 5대 명재상' 가운데 한 사람으로 평가받는다. 이순신과는 어려서부터 같은 동네에서 함께 자라 절친한 사이로 후견인 역할을 하였다. 이순신의 형 이요신과는 친구 사이 이기도 하다.
느낀 점
임진왜란이 일어날 것이라는 여러 징후들이 있었지만, 조정에서는 그 보고를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통신사로 갔던 김성일과 황윤길의 보고가 정반대였기에 선조는 황윤길의 보고를 받아들여 전쟁준비를 하나도 하지 않게 되었다. 당시 이러한 결정은 서인과 동인의 당파싸움에 기인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왜군이 1592년 4월 13일에 부산진에 조총으로 무장하고 20만이 상륙했다. 그리고 3진으로 나누어 17일 만에 걸어서 한양을 점령했다. 이미 선조임금은 한양을 버리고 의주로 피난한 상태였다. 이제 한반도는 전라도와 바다를 제외하고는 모두 점령된 상태였다. 이순신의 옥포해전 승리를 시작으로 연일 승리의 소식을 전해왔다. 서해바다를 정복하지 못한 왜군은 내륙으로 물자공급이 원활하지 않았고, 이것은 왜군에게 무척 스트레스였을 것이다. 명이 두 번이나 파병되어 조선에 왔지만, 4년간의 강화협상은 전쟁보다 조선을 더욱 황폐하게 하였다. 전열을 가다듬은 조선인들은 의병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평양성 전투를 비롯해 행주대첩, 충주전투, 진주성 전투등 내륙에서도 속속 승전보를 전해왔다. 명나라의 군대를 먹이고 , 이순신을 위해 변호를 하고, 무엇보다 선조임금이 중국으로 피난을 가지 못하도록 어르고 달래는 몫은 총지휘관 류성룡의 몫이었다. 그럼에도 북인의 상소로 삭탈관직당하여 안동으로 내려오면서 류성룡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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